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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향곡 8번 (해설:김문경)

romantiker74 2005. 3. 20. 18:42


 

 부천필이 말러의 8번 교향곡을 성공적으로 치루어냈고 이제 또 하나의 8번 교향곡이 6월 13일 예술의 전당에서 대기중이다. 그것은 바로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8번이다. 우리나라의 공연계는 이상하게도 쇼스타코비치의 다른 교향곡들이 늘 5번에 가려져 도저히 빛을 발할 수 없는 형국이다. 지금까지 교향악단 연주회에서 5번 이외의 곡을 별로 본적이 없으며 그러한 증세가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에 KBS 교향악단이 8번을 연주한다고 하여 내심 매우 설렌다. 한달전에 일찌감치 예매를 끝내놓았고 금요일만 기다리는 실정이다 (그런데 관객층을 보니 20대가 많았던 부천필에 비해 KBS는 40대가 많은 듯 하다).

  8번은 7번, 9번과 함께 전쟁 3부작을 이룬다고 흔히들 말하지만 그것은 2차 세계대전의 소용돌이 속에서 작곡되었다는 역사적 사실 빼고는 그렇게 큰 의의를 가진다고 볼 수는 없다. 이들 교향곡이 전쟁 그 자체를 염두에 둔 작품인지 아니면 쇼스타코비치 개인적인 창작욕구의 발산이었는지는 그의 영혼을 훔치기 전에는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유치한 정치색으로 세계를 들썩이게 했던 7번 교향곡과는 달리 (개인적으로는 7번을 매우 퇴행적으로 여기는 바이다. 더구나 ‘막심송 볼레로’에서 나치가 생각날 사람은 거의 없는 듯 싶다) 8번은 뚜렷한 내러티브를 추출하기 힘들다. 8번 교향곡을 해설하는 사람들도 1악장, 4악장이 전쟁의 암울함을 상징한다는 말 이외에는 별로 할말이 없는 듯 하다. 개인적으로는 8번 교향곡을 색깔에 빗댄다면 회색이라 보며 잔혹한 붉은 빛과 희망의 노란색은 전체를 규명짓는 톤이 되기 힘들다. 그리고 이 회색이야 말로 쇼스타코비치를 잘 나타내 주는 색깔이라 본다.

  ‘증언’이란 사소설적 서적에만 물들어 있는 한 우리는 그를 얼치기 레지스탕스로 간주하기 쉽다. 하지만 그는 누구보다도 조국을 사랑했고 민중을 생각한 작곡가가 아니었던가? 그런 점에서 이제는 쇼스타코비치에 대한 정치적 평가를 조금 유보하고 그를 음악 그 자체로 평가해야 될 때도 되었다고 본다. 특히 8번 교향곡은 5번이나 7번보다 순음악적인 요소가 더 많고 바로크적 취미와 관현악 법에 대한 유희적 탐구가 강하여 쇼스타코비치의 절대음악적인 중립성을 살펴보는데 있어 귀중한 자료가 된다고 믿는 바이다.


  8번 교향곡의 구성은 5악장제이지만 내적으로는 4악장제와 다름 아니다. 2, 3악장이 모두 스케르초적인 요소로 되어있어 일종의 더블 스케르초로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가지 특기할 것은 피날레가 마치 에필로그처럼 달려있는 것이다. 즉 쇼스타코비치는 8번 교향곡에서 피날레에 많은 무게를 싣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사실 베토벤 9번 이래로 ‘Finale Problem’은 많은 작곡가를 골치 아프게 했다. 이는 브람스 1번에도 잔영을 드리우고 있고 브루크너는 거대한 피날레를 구축하는데 일생을 보냈다 (파울 베커는 그가 ‘피날레 교향곡’에 완전히 실패하고 오히려 완서악장에서 절정을 맞았다고 평가하고 있다). ‘Finale Problem’은 말러에 의해 완전히 극복되었고 말러의 교향곡들은 ‘피날레 교향곡’으로서의 존엄함을 얻었다. 하지만 쇼스타코비치는 ‘피날레 교향곡’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 그는 오히려 할말을 1악장에서 모두 다 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4,5,6,8,10,13번은 1악장이 가장 거대하며 구성의 밀도가 가장 높다. 8번 교향곡의 진정한 의도는 오히려 1악장에서 느낄 수 있다고 보며 이는 나머지 악장을 묶어서 제2부로 볼 때 1악장 단독으로 제1부를 구성한다고 보겠다.

  편성은 4번처럼 거대하지는 않지만 그의 다른 교향곡과 비교해 볼 때 꽤 큰 편에 속한다. 플륫 4 (3,4주자 피콜로 겸임), 오보에 2, 잉글리쉬 혼 1, E조 클라리넷, 클라리넷 2, 베이스 클라리넷, 파곳 3 (3주자 콘트라 파곳 겸임), 혼 4, 트럼펫 3, 트롬본 3, 튜바, 팀파니, 스네어 드럼, 베이스 드럼, 탬버린, 심벌즈 (2대), 탐탐, 트라이앵글, 실로폰, 현5부. 약간 큰 3관 편성이라 볼 수 있고 특히 타악기군이 풍성하다.


  1악장은 사실 5번 교향곡 1악장의 리바이벌이라고 봐도 좋다. ‘느리게-점점 빠르게-파국-느리게’의 구성은 완전히 카피에 가깝고 2성 대위법에 특유의 부점리듬을 사용한 1주제, 호모포닉한 제1바이올린의 모놀로그는 그야말로 5번 교향곡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말러가 매 교향곡마다 다른 것을 들려주기를 희망했던 것과는 대조적이라 볼 수 있으며 8번 1악장은 일종의 5번 교향곡 업그레이드 형태로 파악할 수 있다.

  점점 빨라지는 부분은 푸가적인 기법으로 마련되었고 여러 주제가 축소되고 확장하여 마구 섞여 돌아가는 거대한 스트레타라 볼 수 있다. 스네어 드럼과 실로폰의 도입은 파국을 향하는데 있어 중요한 지점을 형성한다고 볼 수 있다. 스네어 드럼의 음색이 음악의 장르를 구분 짓는 대중음악 정도는 아니더라도 (하드코어-높고 튀는 톤, 하드록-낮고 깊은 톤) 이를 어떻게 잡느냐가 상당히 중요하다고 본다. 개인적으로는 이 부분에서 낮은 톤의 스네어 드럼을 선호한다. 파국지점은 제1주제를 크게 부풀리는 곳으로 마련되어있고 말러 2번 교향곡 피날레의 지옥문 같은 타악기의 폭발을 들을 수 있다. 집에서는 차마 볼륨을 못 올리는 부분이지만 금요일에는 작열하는 타악기 군을 손실없이 들으리라! 이 부분의 압도적인 음향에서는 가히 ‘전쟁의 공포’가 떠올려 질 법도 한데 피날레의 중간과 링크되어 있다는 점에서 더욱 더 그렇다.

  앞서의 주제들을 회고하는 부분에서는 잉글리쉬 혼이 상당히 긴 솔로를 연주한다. 여기는 ‘트리스탄과 이졸데’ 3막을 연상케 하는 적적함이 감돈다. 로젠스트벤스키 음반에는 잉글리쉬 혼 주자 이름을 표기하기도 하는데 그만큼 이 악기는 1악장 후반부를 장악하고 있다. 같은 선율이라도 이 악기가 불면 웬지 더 서글프게 들리는데 쇼스타코비치도 이점을 염두에 둔 것 같다. 모렌도로 끝맺는 양식은 이 교향곡 전체의 구성을 암시하고 있다.

  2악장과 3악장은 왜곡된 심리, 패로디에만 집중하기보다는 관현악의 신명나는 한판놀이에 귀 기울이는게 더 나을 것 같다. 2악장은 A-B-A-B-A+B 형식이 너무나도 쉽게 감지되는데 A가 위풍당당한 튜티 중심의 사운드이고 B는 목관 솔로 (특히 피콜로와 E조 클라리넷이 1등 공신)가 주축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에 A와 B가 스트레타적으로 엮임은 말러 5번 및 10번 교향곡 스케르초에서도 본 형식이며 8번의 대위적 어법을 좀더 부각시킨다.

  3악장은 차이코프스키 교향곡 4번에서 보인 ‘관과 현의 대결’이 모토가 된 무궁동이다. 또한 이 곡만큼 비올라가 돋보이는 곡도 드물 것인데 특유의 비음으로 박박 긁으면 색다른 감흥을 받는다. 오랫동안 현을 붙이면서 (On the string) 기계적으로 스타카토를 해야 하는 고충이 있는 곡이기도 하다. 4번 교향곡 3악장의 경과부처럼 무미 건조하고 기계적인 섹션이 있는 것이 흠이기는 하나 매우 짧아서 넘어갈만 하다. 트리오는 경박한 쿵작쿵작에 수석 트럼펫이 ‘쇼선생 서커스 왔어요!’라고 외치는 듯 하다 (나는 이 부분에서 자꾸 ‘팔리아치’가 떠오른다). 수석 트럼펫의 개인기가 무엇보다 중요하며 KBS의 수석 트럼펫의 테크닉이 기대되는 부분이기도 한다. 트리오는 현이 가세하면서 점입가경이 되고 완전히 볼쇼이 서커스 음악처럼 된다. 3악장에서 4악장으로 향하는 아타카부분은 광포함의 극치이며 1악장의 파국과 관련이 있는 것 같다. 3번의 탐탐 타격에선 왠지 죽음의 이미지가 그려지기도 한다.

  4악장은 시종 내내 침통한 분위기가 전달되는 파사칼리아로 마련되었고 현 위주의 곡이다. 파사칼리아 주제는 1악장의 테마와 닮은 꼴인데 이 주제를 기억하는 것이 감상에 좀더 도움이 될 것 같다. 중간중간 삽입되는 피콜로와 클라리넷의 독주 그리고 플륫의 플래터 텅잉은 일종의 ‘밤의 음악’ 같은 뉘앙스도 전달한다고 본다. 파사칼리아는 쇼스타코비치에 있어서 그렇게 특이한 형식은 아니며 현악 4중주나 바이올린 협주곡 1번 3악장에서도 들을 수 있다.

  피날레는 아마도 그 진의를 파악하기가 가장 힘든 악장이 될 것이다. 누구는 전쟁에서 벗어난 민중의 기쁨이라고도 하는데 글쎄 필자가 듣기에는 ‘알레그레토 효과’를 노린 에피소드 위주의 모음곡 같다. 형식은 A-B-C-파국-C-B-A으로 간단한데 파국 부분만 거창한 튜티이고 나머지는 거의 실내음악에 가깝다. A주제의 마스코트는 단연 바순이 될테인데 ‘봄의 제전’ 도입부 정도의 살인적인 고음을 불어야 한다. 중간에 삽입된 파국은 피날레 전체중에서 완전히 이질적인 섹션을 선포한다. 1악장의 파국이 점층적이고 만들어진 파국이라면 피날레의 파국은 다분히 돌발적이고 분열적이다. 그러나 더 이상의 공포는 없다는 듯 일상으로 돌아가 조용한 사운드 속에 8번 교향곡은 끝난다.


  아마도 이 곡은 쇼스타코비치의 5번 교향곡처럼 끝나자 마자 성급한 브라보를 들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만큼 이 곡은 진지한 곡이라 할 수 있고 절대음악 쪽의 비중이 높다고 본다. 연주의 성패는 아무래도 1악장을 얼마나 집중력 있고 밀도 있게 가져갈 것이냐가 될 것이다. 느슨한 연주로는 25분에 달하는 1악장을 내내 지루하게 들려줄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2, 3악장은 교향악단의 기능성을 평가하는데 좋은 리트머스 시험지가 될 것이고 큰 실수 없이 원활히 잘 돌아간다면 전곡이 끝난 후 흔쾌히 큰 박수를 보낼 것이다.

  쇼스타코비치의 8번을 예습하기에 좋은 음반으로는 하이팅크 (Decca)가 딱일 것 같다. 베를린 필과 함께한 말러 2번 교향곡을 연상시키는 엄청난 집중력 (특히 타악기군)과 콘서트헤보우의 그윽한 현은 이 곡의 지존으로 부상하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다. 중용적이라는 별명이 무색할 정도로 긴장감과 에너지가 대단한 녹음이라 할 수 있다. 한편 평소 프레빈의 쇼스타코비치를 즐겨 듣는 편은 아니지만 그가 런던 심포니와 한 8번 (EMI)은 상당한 호연이라 생각한다. 일단 1악장에서 작열하는 금관의 사운드가 꽤 자극적이며 파국지점은 실로 거창하다. 또한 3악장이 이렇게 빠르고 생동감 넘치는 녹음도 흔치는 않을 것이다. 지금은 폐반되었지만 로젠스트벤스키 (Melodiya)의 음원도 러시아적인 폭발력을 바탕으로 호쾌한 사운드를 들려주는데 특히 스케르초 악장의 쾌감이 보통이 아니다.

  로스트로포비치 (Teldec)은 상당히 정제된 느낌이며 복잡한 음악을 쉽게 정리하여 풀어내는 재능을 선보이고 있다. 정확성에 있어서는 우월한 측면을 가지지만 추진력과 처절함에 있어 앞선 음원보다 열세를 지닌 것은 부인하기 힘들다. 영국에서는 8번 초연자의 권위를 가진 므라빈스키 (BBC legend)의 음원을 높게 치는 분위기이지만 5번에서 보였던 완벽한 카리스마는 아니며 사색의 여지가 조금 부족하다고 느꼈다. 흥미롭게도 3악장에서 비브라토를 잔뜩 건 트럼펫은 딱 러시아 표다.

  잔덜링 (Berlin classics)은 땀방울이 느껴지는 중량급 연주로 들었으며 콘드라신 (Melodiya)은 매운맛으로 청취했다. 그런데 콘드라신은 강렬한 맛은 있지만 그의 5번 교향곡과 비슷한 문제점을 안고 있어 음표에 세공이 부족하고 서정적 표현에 취약점을 보이고 있다. 56분의 러닝타임도 조금 의아하게 빠른 편이며 녹음상태도 년도에 비해 열약한 편이다. 예르비 (Chandos)는 너무 중립적이며 인발 (Denon)은 특유의 억제된 해석이 그리 매력적이지는 않았다. 게르기에프 (Philips)는 나쁘다고 볼 수 없지만 요즘 그의 떠오르는 녹음들을 볼 때 격세지감이란 단어가 떠오른다. 비쉬코프 (Philips)는 리듬에 융통성이 부족하여 의외로 무감각하고 긴장감이 없는 베를린 필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