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브루크너의 교향곡 4번을 이야기할 순간이 왔다. 많이 들었고 많이 좋아하는 작품이고 무엇보다도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는 작품이라 말을 풀어내기가 참 어려운 것 같다. 글을 쓰려고 몇 번의 시도를 하다가 실패를 했는데 결국 몇 년이 지나고 한동안 브루크너의 음악을 잘 듣지 못하고서야 글을 다시 쓰게 되었다.
이 작품은 물론 브루크너의 교향곡 뿐 아니라 그의 모든 작품을 통해서 가장 유명한 작품이다. 일단은 교향곡 중에서 유일하게 ‘낭만적’이라는 부제가 달려있다는 점이 유명세에 힘을 실어 주었을 것이다.
이 작품은 중학교 2학년이던 1988년 테이프로 처음 들었다. 베토벤의 운명은 정말 운명 같았고 전원은 전원 같았으며 멘델스존의 이탈리아는 정말 이탈리아 같았다. 하지만 이 작품은 왜 스스로 ‘낭만적’이라고 주장하는 것일까? 베토벤의 영웅이 영웅적이라는 것에도 공감을 하지 못하던 (영웅 교향곡에 장송행진곡이 들어가야 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던) 때에 낭만적이라는 부제는 좀 이상하게 느껴졌다. 당시에 테이프로 들을 수 있었던 유일한 브루크너는 카라얀이 지휘한 베를린 필의 연주였다. 테이프 안에 있는 해설을 읽어 봤다. 새벽, 중세의 도시, 멋진 말을 타는 기사, 그들을 삼키는 숲의 마력. 그때서야 “아, 그런 낭만”이라고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끄덕였다. 그 당시 테이프를 빌려준 친구는 3B에서 브람스대신 브루크너가 들어가야 한다고 주장하며 이 작품에 감동받은 모습이었지만 내 반응은 1악장, 3악장은 괜찮은 데 2, 4악장은 좀 지루하다는 것이었다.
이 작품에 공감을 하게 된 것은 그로부터 정말 오랜 세월이 지난 2000년 독일에 머물면서였다. 내가 머물던 칼스루에 시는 도시의 반이 숲인 곳이고 숙소로 잡았던 기숙사도 숲 속에 있었다. 길 저편에 성(城)이 보이는 숲으로 난 길을 따라서 자전거를 타고 학교를 갈 때에 이상하게 이 작품의 멜로디를 흥얼거리게 되었다. 서머타임을 해서 저녁 9시나 10시쯤 숲에 황혼이 질 때도 이 작품을 떠올리곤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CD 속지에 들어 있는 많은 해설에는 브루크너 자신이 ‘낭만적’이라는 제목을 붙이기는 했어도 순음악으로 바라보고 순음악으로서의 매력을 발견해 보라는 말이 많이 적혀 있다.
순음악으로서 이 작품의 매력은 어떤 것일까? 음악세계 작곡가 시리즈 브루크너 편에 보면 브루크너의 경우 교향곡을 거듭할수록 진화된 모습을 보여 시기 구별이 곤란하지만 그래도 해야 한다면 00번부터 교향곡 3번까지의 5개의 단조 교향곡을 초기로 보고 교향곡 4번부터 6번을 장조 교향곡의 시기로 7번은 장조이긴 하지만 8, 9번과 후기 교향곡으로 보고 있다. 4번부터 시작되는 장조 교향곡 시기의 작품은 앞서 발표한 5편의 교향곡과 달리 장조 조성을 사용했고, 장조 교향곡이라고 해서 무조건 밝은 음악을 만들기 보다는 작품 내부에서는 장조와 단조를 서로 엇갈리게 배치하는 등의 기법으로 브루크너 특유의 중후한 분위기를 구축하고 있으며 교향곡 4번은 그 시기를 이끄는 작품이라는 것에 주목할 만 할 것 같다. 이전 작품에서 등장한 2+3 박자와 같은 ‘브루크너 리듬’을 비롯해서 쉼표에 이은 장면 전환, 오르간을 연상시키는 코랄의 3주제, 1, 2, 3악장의 주제 들이 등장하는 복잡다단한 4악장도 브루크너의 개성으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이 작품도 3번 못지않게 판본이 복잡하지만 개정판이 초판보다 월등히 사랑을 받아 판본 게임이 쉽게 끝나 버렸고 결과적으로 대부분의 연주가 1878/1880판에 집중되어 교향곡 3번처럼 음반을 들을 때 판본과의 전쟁을 치룰 수준은 아니다. 초판은 교향곡 2번 탈고 후 몇 달만에 착수해서 거의 1년간 공들여 만든 1874판이고 스케르초와 피날레를 들으면 우리가 알고 있는 이 작품의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수준의 차이를 보인다. 초고를 빈필에 보여 보고 싸늘한 반응을 얻은 브루크너는 1878년 다시 개정에 착수 3악장은 거의 새로 쓰고 나머지 악장들도 꽤 많이 수정한다. 4악장은 초판의 모습이 꽤 남아 있는 데 Volkfest Finale라고 부른다. 1881년 2월 20일 전곡 초연을 위해 악보를 준비하는 과정에서(1880년 판) 4악장을 전면 교체하게 되는데 이 4악장이 오늘날 우리가 듣고 있는 모습이다. 이 후에도 몇 번의 작은 수정이 더해지는데 1881년 12월 10일 2차 연주회를 위해 약간의 수정을 하고 이는 Haas 판에 반영되어 있다. Haas 판보다 더 많이 선택되는 Nowak 판에는 1886년 뉴욕에서 출판하는 과정에서 미세한 수정이 더해진 부분이 반영되어 있다.
1악장은 동이 터오는 중세의 새벽 같은 혼 소리로 시작한다. 작품의 얼굴과도 같은 부분이어서 혹시 미스 톤이 나면 치명적이라 혼 주자의 부담이 클 것 같다. 말을 달리는 듯한 1주제는 기사의 등장을 알리는 것 같은 연주자에 따라서는 스타워즈의 주제가를 연상시키는 팡파르로 발전한다. 반음계적이기도 하고 바로크적이기도 한 제2주제 금관 팡파르의 3주제가 이어지고 머릿속으로 그림만 그려진다면 게르만 사람들이 말하는 낭만을 느끼게 해 준다.
2악장은 처음 들었을 때는 별로 아름답지 않다고 느꼈고 다시 들었을 때는 베토벤 교향곡 7번 2악장같이 율동감 속에 숨겨진 최면적인 느낌이 있다고 느꼈다. 바그너, 말러와 같은 후기 낭만 음악을 접하고 다시 들었을 때는 1악장이 반짝이는 갑옷을 입은 로엔그린이 연상된다면 2악장은 베누스 베르크를 떠나 순례를 하는 탄호이저의 모습이 연상되었다. 처음 들었을 때는 잘 들어오지 않았던 행진곡이나 카논도 어딘지 말러를 연상시키면서도 브루크너 특유의 개성이 있는 모습으로 들어왔다.
3악장은 브루크너 스케르초 중에서 가장 귀에 쏙 들어오는 멜로디를 자랑한다. 사냥의 시작을 알리는 나팔소리가 숲에서 퍼져나가는 듯한 스케르초가 우선 인상적이다. 최면적인 매력이 있고 반복될 때 목관의 에코로 이어가는 트리오도 아름답다.
브루크너의 4악장은 언제나 복잡하고 처음 작품을 접하는 감상자들에게는 분명 진입장벽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브루크너의 나머지 작품들을 섭렵하면서 이 진입장벽을 넘어섰다면 충분히 매력을 느낄 수 있다. 브루크너의 나머지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앞선 악장의 모습이 모두 떠오르며 마지막에 혼으로 1악장의 제1주제를 회상하며 마칠 때는 장대하게 펼쳐진 숲을 보는 것 같은 장엄함과 함께 가슴이 뻥 뚫리는 시원함을 느끼게 된다.
이 작품의 음반은 대부분 Nowak 판이나 Haas 판과 같은 1878/1880 판을 주로 택하고 있다. 두 판본 중에는 Nowak 판이 좀 더 녹음이 많은 것 같다. 귀가 얇은 브루크너가 개정을 하면서 곡의 매력을 까먹는 경우가 많다면서 초판에 애정을 많이 보인 틴트너와 인발 중에 틴트너는 이 작품은 1878/1880 판으로 녹음을 남겼다. 대신 교향곡 00번 음반의 Fill up으로 Volkfest Finale를 넣어 곡에 대한 궁금증 해소 내지는 브루크너 수집가의 편집증을 충족시켜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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