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ndelssohn

멘델스존 이야기 (나무위키)

romantiker74 2022. 7. 31. 14:38

분류: 독일의 작곡가/전기 낭만주의의 작곡가/독일의 지휘자/독일의 피아니스트/독일의 오르가니스트/1809년 출생/1847년 사망/함부르크 출신 인물/유대계 독일인/독일의 개신교 신자/뇌혈관질환으로 죽은 인물

 

1. 개요

창작성 면에선 신동이었고 요절만 빼면 가장 완벽한 인생의 승리자. 음악으로 대성공해서 부와 명예를 얻은 음악가는 많지만, 멘델스존만큼 환경이 완벽한 음악가는 없었다. 천재적인 음악적 재능, 유복한 집안환경, 우아한 용모와 세련된 사교성까지 모든것을 다 갖춘 사기적인 캐릭터. 공교롭게도 그의 이름 중 가장 유명한 '펠릭스(Felix)'는 '행운아'라는 뜻이다.

작곡 뿐만 아니라 연주와 지휘도 했다. 당시 유명한 피아노와 오르간 연주자, 지휘자였다. 자신의 작품이나 다른 작곡자의 작품 모두 지휘했다. 그 밖에도 시나 그림도 꽤 재주가 있었고 영어, 이탈리아어, 그리스어, 프랑스어, 라틴어까지 자유롭게 구사했다.

그리고 바흐 사후 약 80년의 시간이 흐른 1829년, 마태수난곡을 복원하여 바흐의 음악을 다시 세상에 널리 알리게 해주었다. 잊혔던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악보를 거액으로 수집해 마태수난곡을 복원하여 그의 음악을 재평가하면서 널리 알리기도 했다. 이 부분은 2015년 5월 24일자 신비한 TV 서프라이즈 에서 다뤘는데, 하필이면 신빙성 없는 푸줏간 이야기를 그대로 써먹었다. 어찌되었든 멘델스존이 마태수난곡을 복원하고 연주한 사건은 음악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사건 중 하나다. 이로써 바흐는 음악계에서 완벽하게 부활하게 되었고 멘델스존의 위대한 업적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물론 당대에 마태수난곡 같은 바흐의 명곡들은 음지에 묻혔지만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그 자체는 묻힌 이름이 아니었다. 멘델스존이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잊힌 여러 명곡을 발굴하기 전까지 출판된 많은 음악 서적에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이름이 언급되는 게 그 증거. 그러나 당시 유럽에는 '과거의 음악'을 연주회에 올려 연주하는 관습이 없었고, 낭만주의 시대 이전에는 작곡가들에게조차 '후세에도 길이 연주될 만한 나의 곡'을 작곡한다는 관념이 거의 없었다. 과거의 음악을 연주회의 곡으로 선정하는 것은 낭만주의 시대에 들어와서야 생긴 것이다. 이는 바흐도 마찬가지였다. 바흐의 이름과 그의 작품은 즉 전문 학자나 음악가들 사이에서나 알려진 형태이지, 일반 대중들에겐 묻혀진게 맞다. 멘델스존은 이런 바흐의 인지도를 확 끌어올린 것이다.

로베르트 슈만의 교향곡 제1번은 1841년 3월 31일에 라이프치히에서 멘델스존이 직접 지휘를 하고,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관현악단에서 연주하여 초연되었고, 당시 작센 왕국의 군주였던 프레데리크 아우구스투스 2세에게 헌정되었다. 반면 교향곡 제4번은 지휘할 예정이었지만 건강 상의 이유로 취소했다.

 

2. 생애

북부 독일 함부르크의 명망 있는 유태인 가문에서 4남매 중 2째로 태어나 유복하게 성장하였다. 할아버지는 독일 계몽시대 철학자이자 라이프니츠 볼프학파의 한 사람으로, 유대인 계몽주의 운동인 하스칼라의 선구자이기도 한 모제스 멘델스존이었으며, 아버지 아브라함 멘델스존은 부유한 은행장이었다. 다만 멘델스존의 할아버지와 아버지 사이는 소원했는데, 주류사회로의 동화를 추구한 하스칼라의 선구자이긴 했지만 유대인인 본인의 혈통 자체에는 자부심이 있던 할아버지와 달리, 아버지는 유대교와 유대인 혈통을 구시대적인 것으로 여겨 개신교로 개종하고 성까지 아내의 성인 바르톨디(Bartholdy)로 갈아치울 중도로 열렬한 동화주의자였기 때문이었다. 한 마디로 두 사람의 각각 자신을 바라보는 시각에 차이가 있었다.

어머니는 아마추어 음악인이자 영문학/불문학/이탈리아 문학가이고 누이들과도 화목하게 지냈는데 누나인 파니 멘델스존(1805~1847)에게 특히 꽤 의지했다. 파니 역시 음악가였지만 여자라는 이유로 홀대받았다.

여기에 아름다운 아내 세실 샤를로트 소피 장르노(Cécile Charlotte Sophie Jeanrenaud,1817~1853)와 결혼하여 자녀 다섯 명[6]을 낳고, 그들과 더불어 행복한 가정생활까지 향유했던 걸[7] 생각하면, 음악가로서는 더 바랄 것이 없었던 행운아였다. 멘델스존 자신의 재능을 제쳐두고서라도 축복받은 인생. 당대 최고의 문호인 요한 볼프강 폰 괴테가 어린 멘델스존의 천재성을 보고 칭찬했다는 사실만 봐도, 괴테를 만날 수 있을 만한 가문의 자제, 빛나는 천재성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때 괴테가 멘델스존의 연주를 듣고 "저 아이의 실력에 비하면 모차르트는 어린애가 빽빽거리며 소리지르는 수준일 뿐이야."라고 말할 정도였다. 참고로 베토벤의 제자였으나 묻혀진 음악가 이그나츠 모셸레스(Ignaz Moscheles,1794~1870)도 유태인이었고 멘델스존을 어릴 적에 가르치는 스승 중 하나이다.

아들의 생일 선물로 아버지가 아들이 단장인 악단까지 만들어 주었는데 당시 음악가들에선 흔치 않은 예라서 많이 질투받기도 했다. 질투한 가장 유명한 사람이라면 역시 리하르트 바그너.

위에 언급한 바그너의 예 말고도 멘델스존은 생전에 열폭 비스무리한 까임당한 적이 많았다. 일례로 '음악이 지나치게 분위기가 밝기만 하고 깊이가 없다', '평범한 음악가들의 생계 문제에 신경 쓰지도 않는 거만한 도련님' 등등. 첫 번째는 말 그대로 열폭 수준이고[8] 두 번째도 멘델스존 본인은 가난한 연주자들의 복지 문제에 상당히 관심이 있었고, 이것을 개선하려고 꽤 노력했으므로 그의 입장에선 억울한 주장인데 이런 까임은 유복한 환경만의 문제는 아닌 듯하다. 다만 성격 면에서는 어릴 때부터 그리 좋지는 않았다는 소문이 있는데, 어린 시절 펠릭스가 화를 내면 어머니 외에는 아무도 말릴 수 없었고 그나마 어머니도 손을 잡고 재우는 방법만이 유일했으며, 어른이 되어서도 라이프치히 음악학교 교수 재임 시절에 멘델스존이 제자를 인격에 토대해 모욕하고 그것을 낙서해 동료 교수들과 낄낄거렸다는 기록을 고려하면 매우 한정된 사람하고만 쉽게 잘 사귀는 인재였던 듯하다. 즉, 동시대 음악가들한테 부러움의 시샘이 아닌 진짜 미움받았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멘델스존의 천재성은 음악 작곡보다는 독일의 음악상 위상을 제고하는 곳에 더 많이 쓰였다고 간주해야 타당할는지도 모른다. 라이프치히 음악학교의 이름이 라이프치히 "펠릭스 멘델스존 바르톨디" 예술대학이라는 사실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독일에서 가장 오래된 음악학교의 설립자이자 교수였고 슈만과 함께 경제상으로 어려운 음악가들에게 기회를 제공하려고 많이 노력하는 등 수 많은 일했고 독일의 음악상 위상은 실제로 아주 높아졌다. 당대 트로이카 중 한 명이던 쇼팽에게도 높은 금액의 공연료를 주면서 연주할 기회를 주기도 했듯이 많은 업적을 남긴 음악가였지만, 아깝게도 38세에 요절하고 만다. 죽기 전에는 악화한 건강으로 고생했는데 과로[9]가 건강을 더욱 악화하게 한 듯하다. 그 와중에 누나 파니[10]의 급작스러운 사망이 멘델스존에게 지울 수 없는 큰 비통에 빠지게 했고 그후 그 애통한 충격으로 말미암아 6개월이 채 안 되어 멘델스존도 뇌졸중으로 숨을 거두고 만다. 9번 교향곡까지도 못 만들었다.

후손들은 음악과 무관했다. 큰아들인 칼 볼프강은 역사학자가 되어 대학교수까지 되며 역사학자로 이름을 날렸다가 1897년 59세로 세상을 떠났고 둘째 파울은 화학자가 되어 아그파 필름을 세웠으나 39세로 요절했다. 막내아들 펠릭스는 7살에 홍역에 걸려 죽었으며 두 딸은 그냥 주부로 평범하게 살다가 갔다.

유태인이지만 기독교로 개종하고 부유층으로 기득권에 들어갔기에 살아서도, 죽어서도 독일에서 위대한 음악가로 기려졌고 본인도 독일인으로 자부했기에(아버지부터도 독일인이라고 자부하고 살던만큼, 자녀들에게 조국은 독일이라고 인식해가며 키웠다.) 현대 이스라엘에서 자국 음악가이라고 주장하지 못하고 있다. 카프카나 말러같이 국적에 대하여 모호하게 대한 유태인들을 이스라엘이 자국 자랑이라고 홍보하는 행위와 대조적이다.

 

3. 여담

혈통적으로 유대인이라 나치 독일 시기에는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앞에 서있던 동상이 헐리는 등의 수난을 당했다. 나치 독일이 하루밤 사이에 기습적으로 철거해 버렸는데, 순회공연차 라이프치히에 와 있던 지휘자 토머스 비첨 경과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는 항의의 의미로 다음날 공연에서 전원 사복 차림으로 무대에 올랐다고 한다. 이후 라이프치히 시에서 2005년에 최대한 원형에 가깝게 복원해 새로운 동상을 세웠다.


그의 차남인 화학자 파울 멘델스존(1841~1880)이 1867년 설립한 회사는 2005년까지 이어져 왔다. 바로 아그파 필름이다. 하지만 파울도 아버지랑 비슷한 나이인 39세로 심장마비로 요절하고 조카인 프란츠 오펜하임(1852~1929)이 뒤를 이어 회사를 운영했다. 공교롭게도 아그파는 1900년대 들어서 이게파르벤으로 합쳐지고 독가스인 치클론 B를 만들어 많은 유태인과 포로들을 학살하게 했다.


멘델스존의 할아버지인 모세 멘델스존은 곱사등이였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이에 얽힌 제법 감동적인 야사가 있다.
젊은 시절 함부르크의 어느 상인 집에 들렀던 모세 멘델스존은 그 집의 아름다운 딸 프룸체에게 반했지만 프룸체는 곱사등이인 모세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시간은 흘러 결국 모세가 함부르크를 떠나 고향으로 돌아갈 날이 다가왔고, 마지막 날 모세는 용기를 내어 프룸체에게 말을 걸었다. "당신은 하느님께서 미래의 배우자를 정해주신다는 말을 믿나요?" 그러자 프룸체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반문했다. "네. 당신도 그 말을 믿나요?" "물론이지요. 내가 태어날 때도 하느님은 내게 미래의 신부를 정해주셨답니다. 그런데 이렇게 덧붙이시더군요. '하지만 너의 아내는 곱사등이일 것이다.' 그 말을 들은 내가 외쳤죠. '안 됩니다, 하느님! 차라리 저를 곱사등이로 만드시고 제 신부에게는 아름다움을 주십시오!' 그래서 나는 곱사등이로 태어났답니다." 그 말을 들은 프룸체는 처음으로 모세의 눈을 깊이 바라보았고, 마침내 그에게 다가와 그의 손을 잡았다. 이후 그녀는 모세 멘델스존의 헌신적인 아내가 되었다.


해당 이야기는 선물이라는 책에서 소개된 내용. 다만 위에서도 말했듯 멘델스존 가문은 부유한 은행가 집안이었던 만큼, 엄밀히 따지면 '가난하고 장애도 있는 청년이 진심 하나만으로 부잣집 아가씨의 사랑을 얻은' 그런 이야기는 아니다. 그러나 프룸체가 모세의 재산에 눈이 먼 속물이었다고 볼 것도 아니고, '프룸체를 사랑한 모세의 마음이 결국 그녀에게도 닿았다' 정도의 의미는 있을 듯.

 

아버지 아브라함이 경영했던 멘델스존 은행은 20세기 초까지 독일의 대형 은행으로 성장했고, 독일의 패전과 대공황 때도 경영 위기를 잘 넘겼다. 하지만 히틀러가 집권한 후 반유대정책을 펼치면서 위축되었고, 1938년에 도이체방크에 일방적으로 흡수되어 사라졌다.

 

베토벤의 대 푸가가 워낙에 복잡난해한 작품이다 보니 '아, 그거 대선배님의 걸작이죠'라는 요식 행위성 찬사만 보냈을 뿐이고 곡을 제대로 이해하지는 못했다. 이건 멘델스존 뿐만 아니라 다른 음악가들도 마찬가지여서 대 푸가가 제대로 분석되어서 그 가치를 인정받은 것은 20세기에 쇤베르크나 스트라빈스키 등이 연구를 하면서부터 가능했다.